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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옹동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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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옹동. 초양산 산중턱에 있는 암동이다. 원암파에 쉽게 풍화된 덩어리모양의 마그마 조각이 많은데, 이는 호계(개울명)의 침식작용에 크고 작은 동굴이 생긴뒤 또한 지각상승에 의하여 형성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범리의 스승 예자는 월나라에게 도와주고 오나라를 멸하는데 불량한 풍속을 싫어하고 속세를 떠나, 이곳에 은거하여 이름을 얻게 된다. 명대 읍인어사 번헌과와 형부상수 이주가 여거서 공부하였다. 역대 마애 60곳이 있는데 서체가 다양하며 서예가 뛰어나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서의 선도마애의 진수가 여기에 있다. 그중에도 전성(전: 전서) 이양빙의 “예옹동” 석각이  진품에 속한다.

  빙허각. “예옹동”석각은 선도 마애석각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진귀한 보물인데 “비호””전성”의 미명을 지닌 당건원년간 진운 현령 이양빙이 남긴 것이다. 이 진귀한 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대사람들은 석각의 윗쪽에 특별히 정자를 지어 비와 바람을 막아주었다. 정자가 바위에 허공에 떠 있어 빙허각이라고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호법(서)정이라고도 한다.

 

  초양곡. 예웅동의 내부 경관은 독특하고 등잔동, 미사동, 독서동 3개의 동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침 해가 뜰 때 해빛이 동굴내로 직사하여 들어오는데 한 가닥의 해빛은 다른 방향으로 향한 3개 동굴로 뚫고 나가는데 “양곡삼규”라고 하게 되였다. 가장 북쪽에는 “초양곡”마애석각이 있는데 안진경의 서예이다. “초”자는 점이 하나 부족한데 서법가는 일부러 그렇게 하였다. 아침의 첫줄기 해빛이 직사하여 들어오면 이 점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초양산에 유곡과 같은 동굴이 있는데 동굴 입구는 동쪽으로 향하고 매일 아침햇살이 맨처음으로 여기에 비추어 양곡동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초양동이라고도 한다.

 

  독봉서원. 뒤쪽으로는 호산을 기대고 있고 연계를 마주하고 있으며 송원 8대서원 중의 하나이고 송조의 저명한 유가이학자 주희가 선도에서 강의를 하셨던 기념지이다. 가정년간, 엽사창은 복호암 산기슭에 예전을 건설하다는 것을 제안하고 걸설되었다. 함순7년에, 재건설하게 되였는데 그뒤로는 명홍무년 지현 주성원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청동치12년 남향의 백성들은 지금의 주소를 선택하여 재건설을 하였다. 서원은 완청 시기의 건축양식이고 총 면적이 1200평방미터이고 주체가 3칸3진이며 좌우로 방이 열개씩이고 북쪽의 방외에는 녹사(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공사(사당)로 변했다.

 

  감목암. 군옥산 남쪽기슭에 동서향으로 되어 있는 벼랑이 있는데 이는 병장이 시냇가에 서있는 듯하다. 감은 불그스레한 흑색이고, 목은 윤택, 윤기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감목암은 윤기있는 불그스레한 흑암이라는 뜻이다. 암벽에는 서법 태두 사맹해 1981년에 새긴 “선도”마애가 있는데 필법이 섬세하고, 이는 사맹해 만년의 뛰어난 작품이며 선도마애 중의 명품이다. 청나라 건륭년간 진운의 훈도(관직) 왕호가  

 

  선녀봉. 군옥산 서남쪽의 기슭에는 기둥모양의 산봉우리이 많은데 바위 밑부분은 오목하게 들어가 있고 시냇물이 가득 차 있다. 이는 갓 피여난 연꽃과도 같은데 아름다운 소녀들이 멀리서 독봉서원 후산의 자연적인 달빛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 선녀가 거울을 비추는 기관을 조성하였다. 선녀봉은 감목에 위치하여 있고 오노암의 동쪽에 있어 아침에는 초양을 맞이할수 있어 동몽암이라고도 한다. 선녀봉, 오노봉은 예전의 유문암대지가 풍화, 침식, 붕괴작용에 의하여 남아 있는 암체이다.

 

  월경암. 독봉서원 호산위에 있는 바위이고 금병마냥 얇은 천연적으로 6각형의 구멍이 형성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달과 같기도 하고 거울과 같기도 한다. 이는 군옥산의 선녀봉과 같이 선녀가 거울을 비추는 기관을 조성하였다. 유문암의 많은 절리들이 빗물침식, 자연풍화, 중력붕괴작용에 의하여 가파로운 암병풍과 아름다운 구멍이 형성되었다.

 

  오노봉. 선녀봉 북쪽에는 5개의 기암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가 3장(1장: 약3.33m)에서 9장까지이며 차분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5명의 노인과 같아서 오노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5 분 노인은 중앙황제, 동방청제, 남방적제, 서방백제, 북방흑제인데 원래는 각각 숭산, 태산, 형산, 화산, 항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황제가 정호봉에서 단약을 만들기 시작한 후 5분의 선인이 선도에 모여서 날마다 여기서 아침 햇살을 맞이하고 노을을 감상하였다가 단약을 다 만든뒤 함께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보새. 오노봉 북쪽의 밭에는 도장과 같은 거석이 있는데 이를 황제보새(속칭: 황제인)라고 한다. 고대 황제의 도장을 새라고 하였는데, 공,사 용으로 나누게 되고, 공으로 사용되는 도장은 보새라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의 대장군 력목은 전쟁으로 밖에 있었는데 적군은 사람을 파견하여 날조된 황제의 성지를 전달한 까닭에 전패하였다. 이리하여 모략에 능한 풍후(재상)는 보새를 창제하여 정무는 황제 보새인을 근거로 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곳에 황제보새가 있기 때문에 진운현에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뒤로 어느 풍수장이 보새에 틈 두줄을 새긴 까닭에 진운현에 청나라 강희9년(1670)후 206년간 진사가 하나도 없었다.

  향암동. 호산의 동남쪽 기슭의 산길 옆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동굴 밑부분은 웨지 모양으로 되어 있고 동굴내는 사람 10여명을 융납할수 있다. 동굴입구에는 청나라함풍원년(1851)의 진운 지현 이업수가 새긴 “향암”이라는 석각이 있다. 이 근처는 산이 많고 나무가 무성하여 행인들이 동굴입구를 지나갈때 발자국소리나 웃음소리의 메아리가 우렁찼다. 돌로 동굴벽을 치면 소리는 북을 치는것처럼 맑고 낭랑하기 때문에 향암동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양씨라는 낭군이 이 동굴에서 지내면서 여행객들한테 약을 지원하였다. 이로하여 양낭동이라고 부르게 된다.

 

  쥐가 기름을 훔치다. 전하는데 의하면 청당은 원래 식용유가 가득 담긴 기름항아리였다. 쥐 한마리가 청당후산으로 몰래 들어와 뾰족한 입을 기름항아리에 들어가서 기꺽 기름을 훔쳐 먹었다. 마침 이때 신선 한분이 여기를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보고 선추를 털어서 이 쥐는 작은 산으로 되고 기름항아리는 청탕으로 되고, 이로 인하여 이 생동감이 있는 쥐가 기름을 훔치는 경관을 남기되 되었다. 귀는 12가지띠중의 우두머리 때문에 풍수장이는 여기가 풍수가 아주 좋다고 여겼다.

 

  약이지, 청당이라고도 한다. 청당에는 주학정이 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와 신선 양음이 이곳에서 유람하였다. 청당 뒤에 쥐와 같은 작은 산이 있는데 쥐의 입이 청탕에 꽂아 있는것 같아 쥐가 기름을 훔친다고 이름을 지게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여기의 풍수가 아주 좋아서 묘를 한번 쓰면 그 집안에 진사가 18명이나 나올수 있다고 한다. 한 풍수장이 무덤 주인집과 원한 관계라서 수를 써서 무덤을 파괴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우뢰와 비가 교차하고 청당에서는 잉어 17마리가 솟아나왔는데 제18마리의 잉어가 청당에서 솟아나오려는 순간 풍수장이는 갑자기 마음속으로 동정심이 생겨 제18마리의 잉어를 다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하여 무덤주 집안에 절름발 진사 한명만 나왔는데 이리하여 약이지 라고 하게 되었다.

 

  청련석. 전하는데 의하면 정호 중에 황제께서 승천했을 때 밟았던 금련화가 자라고 있다. 금련화의 향이 만리에 풍겨서 선인들이 많이 따러 왔다고 한다. 옥황상제가 이를 듣고 천병을 파견하여 천궁후원에다 이 금련화를 이식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두 꽃잎이 떨어져서 바람에 따라 날리였고 그중 작은 꽃잎은 초양산 기슭의 금화담 물속에 떨어져서 연꽃모양의 거석이 되여 사람들은 이를 청연석이라고 부른다. 청련석에 명용경5년(1571) 진사 이백춘이 만력18년(1590)년에 새긴 “청연석”이라는 글자가 있다. 청련석 위에는 문어정이 건설되여 있다.

 

  문어정. 청련석 위에 있는 정자이다. 겹처마팔각에 뾰족한 꼭대기모양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대들보에 채화를 그려 있으며 천정에 물고기 두마리로 장식되 어 있다. 문어장 밑의 길이는 5미터이고, 높이는 7미터이다. 이곳은 계곡옆에 있는 휴식이나 낚시를 즐길수 있는 좋은 곳이다. 명가정년간 뢰선으로 자칭한 사람이 그 당시에 예옹동에 은거하고 있는 어사 번헌과를 방문하러 온 길에 이곳에 길을 잃어 어부에게 길을 물어 길을 안내받았다. 이로 인하여 뢰선는 이 일을 시에 “동굴에 안개가 지욱하고 선인이 바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방문하러 온 길에 갑자기 길을 잃어서 어부의 인도에 덕분에 꽃밭을 거쳐 목적지를 찾았다”라고 기록하였다. 후인들이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문어정이라고 부른다.

 

  군자석. 군자석은 원래는 초양산이 호계로 뻗어 나가는 천연석병이었고 든든한 기둥과 같이 격류가 흐르는 곳에 있으며 청련석과 문어정을 위해 계곡의 상류수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군자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58년 도로를 건설했을 때 석병 중간 분위를 폭발시켜 끊어졌고 이로 인하여 남송 장원 왕십붕 등 명인들이 써놓은 여러 군데의 마애가 파괴되었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석각은 “군자석””문어정“산여평적” 세 군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