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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봉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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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선교. 각 곳의 신선들이 한데 모이는 것을 뜻한다. 쌍아치형 돌다리 양측에 여덟 신선들이 가지고 있는 법기들이 조각되었는데, 이것을 “도가팔보”라고 부른다. 도가팔보는 운수가 대통하고 만사가 순조롭고 재앙을 복으로 바뀌고 또한 여덟 신선의 생신을 경축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난간기둥과 난간판에는 다채로운 상운을 조각하여 이 다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속세를 벗어난 경지에 들어오고 아름다운 선경중에서 심신이 승화되었음을 상징한다.

  선학영빈. 북송의<도경>에 따르면 당천보7년(기원 748년) 6월 8일, 갑자기 진운산 주위에 다채로운 상운이 둘러싸여 있고 구름속에 선악이 울려퍼지며 난새와 학들이 춤추고 산이 “만세”라고 소리높여 환호하니 군산들이 모두 응답했다고 한다. 진운군 자사 묘봉천이 이 일을 조정에 상주하였는데 당현종 이융기는 크게 기뻐서 “이는 정말로 선인들이 모이는 도성이다”라고 하였고 흥김에 “선도”라는 두 글자를 어필하였는데 이로부터 진운산을 선도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선학영빈 조각군상은 중국미술학원의 왕탁여교수와 심해구교수가 주로 디자인하고 선학 12 마리가 1년의 12개 월을 대표하고 이는 언제나 춤을 추어 기쁜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함을 뜻한다.

  앙봉주. 정호봉 맞은편에는 큰 모래섬이 있는데 면적이 약 120묘이고, 이는 정호봉을 바라보는 가장 좋은 위치라서 앙봉주라고 불리게 된다. 푸르른 산과 맑은 물이 에둘러 있고 자연의 영기가 서려 있으며 사계절 흐리거나 개이거나 우설이 내려 그 경관이 심히 변화무쌍하다. 굴피나무가 우거지고 송나무들이 제법 숲을 이루었고 매화가 꽃바다를 이루며 곳곳에 꽃을 피어 있고 푸른 풀이 융단과 같다. 이런 아름다운 곳은 영화제작진이 선호할 수 밖에 없는 아주 훌륭한 곳이다. 이곳에서

  등선교. 이는 앙봉주에서 정호봉과 황제사우로 갈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로서 다리의 길이가 77미터, 넓이가 0.77미터, 높이가 0.8미터이며 다리의 노면과 기둥이“정(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정보교라는 속칭을 가지게 된다. 또한 황제가 단약을 만들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여 등선교라고도 한다. 정보교는 진운 고대의 전형적인 건축물로서 구조가 합리하고 그 형태가 아름다우며 자연산수와 서로 잘 어울리고 높은 역사적∙예술적∙과학적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성급 중점문물보호대상이다.  “원림지부(원림건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제대학교 진종주교수는 “이 다리가 소박하고 실용적이며 고대 돌반교의 대표이다”라고 하였다.”

  정호봉, 독봉이나 단봉으로도 하고 석순이라는 속칭도 가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보허산과 대치하고 서쪽으로는 연계수와 인접해 있으며 그 밑부분의 면적이 2468평방미터이고 꼭대기의 면적이 710평방미터이며 높이는 170.8미터인데 땅에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듯하여 힘찬 기운을 자랑하고 있으며 1억 6천만년전 화산이 분출하여 누적된 유문암대지에 속하고 지질외력작용으로 인해 기둥 모양의 산봉을 형성하였는데 “천하제일봉”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가 봉우리꼭대기에 정을 설치하여 단약을 만들었는데 그후 룡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한다. 봉우리꼭대기 소나무와 잣나무들 사이에 단정이 오목하게 들어가 작은 호수가 형성되었는데 호수물이 맑고 사계절이 분명해서 정호라고 이름을 지게 되었고 정호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역시 이와 같다.

  보허산. 동쪽으로는 고천평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정호봉과 인접하여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고대에 산꼭대기 하늘높이 선악(음악소리)이 자주 울렸는데 이는 신선들이 희미하게 걸으면서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는 걸음소리와 같아서 그 이름을 보허산이라 하였다. 걸어서 올라가면 돌계단이 천 층이나 있고 길을 따라 기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데 그중에서도 두암삼기가 유달리 아름답다. 봉우리꼭대기는 제단과 같이 평평하고 해발이 364미터이며 그 위에는 보허정이 있다. 정자 아래에 천길 벼랑이고 괴석들이 우뚝 솟아 있다. 난간에 기대여 정호를 가까이 굽어볼수 있고 멀리로는 산야를 내려다볼수 있어서 마치 선경에 처해 있는 듯하다. 운무가 피여오를 때면 이는 더욱이 선인이 걷는 듯하다. 당나라 유처정 등 고승들이 이곳에서 오곡을 먹지 않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두암삼기. 보호산의 산허리에는 거석이 3 덩어리가 있는데 왼쪽의 기석에 소나무 하나가 자라고 있고 소나무의 모양은 번체자“화”자와 같은데, “몽필생화”라고 한다. 이것이 첫번째의 기이다. 중간의 기석은 머리를 남쪽에 향하고 산허리에 앉아 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천구와 같아서 “천구망월”이라고 하고 이것이 두번째의 기이다. 오른쪽의 기석은 부엉이가 정호봉을 향하고 서 있고 선단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삼우라고 한다. 3개의 기석은 함께 “산”자를 형성하고 유람객들을 합하여 “선”자를 이루는데, 이는 “호계는 늘 좋고, 선도에는 모두 신선이다”라는 생동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황제사우. 이의 전신은 동진함화연간에 건설된 진운당인데,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사우는 황제의 3대 행궁 중 하나이고 삼천자도의 소재지이다. 당천보7년 당현종 이용기가 항제사우로 개명하였고, 북송치평년간에 옥허공이라고 개명하였으며 송원시기에 전성기에 맞이하여 건축을 24개이나 지니고 있었으며 천순예년간에 전화로 인해 파괴되었다. 1998년에 재건설되었고 공문, 헌원전, 진운당, 회조장, 등용각, 유용헌 등이 있는데 건축면적이 5700평방미터이다. 항제사우는 섬서성에 있는 황제릉과 서로 호응하여 “북릉남사” 구조로 형성하였는데 중국 남쪽의 제사중심과 황제문화복사중심이였다. 매년 청명절, 중양절에 거행하는 진운헌원제전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이다.

  황제문화전시관. 중화민족자손의 뿌리를 찾을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서 애국주의 교육기지이기도 하다. 제1부분은 헌원황제의 소개, 제2부분은 헌원황제와 진운선도의 소개, 제3부분은 황제사우의 변천 소개, 제4부분은 진운황제문화에 대한 연구결과 소개, 제 5부분은 황제내경와 진운풍속의 소개, 제6부분은 출토유물 등 실물전시, 이에 대한 문자소개가 자세하고 그림이 풍부하며 진운황제문화의 정수를 전시한 전국에서 가장 큰 황제문화전시관이다. (주: 황제문화전시관의 소개는 재설계된 전시에 따라 내용을 재조정해야 함다.)

  선도산. “높이가 600장이고 둘레가 300리인데 본명이 진운산이였다”(『일통지』). 기원423년 사영운이 명성을 흠모하여 진운의 유적을 찾으러 왔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고승 육수정, 손유악도 이곳에 은거해서 도를 닦았다. 이를 통하여 남조시기에 이곳은 벌써 유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초기의 10대명산 중에 하나였고 천보7년에는 “채운선낙지서(서:상서)”이 있었기 때문에 선도산이라고 개명하였다. 이는 도교 36개 동천 중의 제29개의 “현도기선동천”이다. 선도산에 기이한 산봉과 동굴이 많은데 주봉우리의 해발은 477.8미터이고, 이의 위에는 천지가 있는데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온다.

  구곡연계, 연금계이나 금계라고도 한다. 윗부분의 석벽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산을 에둘러 부용협, 주담산, 정호봉, 예옹동, 소적벽 등 유람지를 거치며 주촌송유주까지, 구곡, 구담, 구교, 구언, 구탄, 구도가 있다. 계곡에 따라 산과 석이 기이하고 동굴은 유수하고 개울물이 맑고 촌락이 교차되어 있어 “구곡연게, 십리화랑”이라고 부르게 된다. 특히 연계의 아침 안개는 더욱 기관이다.

  릉허동. 보허산 절벽위에 있는데 높이가 약 40미터, 넓이가 9.5미터이고 세계에서 드문 화산폭발통로유적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개미집과 같고 가까이 바라보면 알둥지와 같다. 유문암 석알 중에 광주리보다 큰 것도 있고, 녹두와 같은 작은 것도 있는데 이들이 겹치면서 크고 작은 형태가 기이한 동굴로 형성되었다. 주동굴의 깊이는 4미터을 넘고 높이는 약 2미터인데 동굴벽의 알석 사이에 구멍이가 많다. 옛날에는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굴을 통해 하늘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릉허라고 하였다. 당나라 고승 허작, 유초정은 이 릉허동에 수련하였기 때문에 은진동이라고도 한다.

  선수동, 경암이라고도 한다. 보호산 서북쪽 기슭에 가파른 절벽에 위치하여 있는데 고대에는 사다리를 걸쳐 올라가야 했는데 지금은 돌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갈 수 있다. 동굴의 높이와 깊이는 각각 약 3미터이고 넓이는 4미터이다. 샘물이 동굴꼭대기 틈새에서 흘려내려와서 작은 늪에 흘러들어간다. 수질은 맑고 달콤한데 가뭄계절에도 마르지 않고, 비축해도 변질하지 않고 자주 마시면 장수할수 있어 (신)선수라고 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는 이 물을 가지고 단약을 만들었고 양대 저명한 도사 도홍경은 『수선부』를 작성해서 후세에 전해진다. 당나라 고승 주경복은 여기에 은거해서 오곡을 먹지 않고 샘물만 마셨는데 백여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역대 명인 사영운, 백거의, 단성식, 피일휴, 육귀몽, 조변, 심괄, 서하객 등이 여기에 족적이나 문장을 남겼는데 동굴벽에는 38곳의 마애석각이 있고 동굴 아래에는 회랑, 정자와 차실을 새롭게 건설하였다.

  망귀동. 상전호 뒷산의 동북비탈에 위치하여 있는데 동굴 입구는 북쪽으로 향하여 소귀산(작은 거북산)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망귀동이라고 한다. 동굴내는 석실 두개가 있는데 10여명의 사람을 용납할수 있다. 옛날에 동굴앞에 망귀정이 있었고 동굴 입구에 누워 있는 평평한 거석이 석선침대라고 한다. “동굴 외 개울에 돌이 있는데 관광객들은 이에 선도의 경치를 마음껏 느릴수 있어 돌아가는것을 잊게 하여 망귀대라고 하였다”(원『선도지』), 이리하여 동굴명을 망귀라고 하였다. 송조 유명한 도학자 주희가 선도에서 강의를 했을 떼 “말에 내려서 이곳에 앉으면 경치를 누리고 돌아가는 것을 잊게 되고 이 아름다운 산수는 고향과 같다”라는 시구를 남겼다.

  금용동. 하궁 구덩이 밑의 산에 위치하여 있는 동굴이다. 금용동은 누각과 같이 위가 크고 아래가 작은 두칸의 실로 나누어 중간에는 두개의 작은 동굴로 연결되어 있다. 동굴내 맑고 벽에 구멍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어떤 구멍이는 깊이를 측정할수가 없다. 도가는 이를 선도에 있는 신선들에게 기도하는 동천의 문이라고 하였다. 손진종은 사자를 보내 동굴에 금용, 옥간을 넣었는데 1997년 촌민들이 의외로 발굴되었다. 옛날에 백성들은 여기서 비 오기를 빌었기 때문에 북해동이라고 속칭하게 된다. 당대의 고도(도사) 유처정은 동굴 옆에 집을 지어서 도를 닦았는데 그 후에 둥굴뒤에 도관을 건설하였다. 당희종은 이 도관을 선도관이라고 사명하였고 그뒤에 송영종이 묘정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자봉. 정호봉의 측면에는 소봉암(작은 봉우리)이 있는데 높이가 40미터가 넘고 작고 예리한데 죽순과 비슷하여 석순예라고 한다. 정호봉의 산허리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사람의 배꼽과 비슷하다. 소봉암의 높이는 이 배꼽과 같고 어머니(석순) 옆의 개대어 있는 귀여운 아기와 같아서 동자봉이라고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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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지정. 정호봉 앞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정자에서 높고 웅장한 정호봉을 바라볼 때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하고 경모하는 감정을 자아내게 하여 앙지정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이 정자는 청나라 초기에 파손되었다가 새로운 정자는 겹처마 지붕과 12개의 기둥이로 건설되어 있고 대만동포인 이연품, 서수복이 의연하여 건설되었다. 정자편액에 써 있는 “앙지정”은 저명한 서법가인 이영이 친필로 쓴 것이다. 정자내의 시구는 저명한 학자∙시인∙서법가인 오아경이 쓴 것이다.

  보허정. 보허산 꼭대기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높이가 5미터이고 사각형의 첨두 아치가 있는 홑처마식 정자인데, 이를 보허정이라고 부른다. 1979년에 건설되었는데 산에 따라 이름을 갖게 되었다. 보허정의 편액은 근대 서법 태두 사맹해가 친필로 썼다. 보허정을 건설했 때 석연, 석필을 파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이들은 고대시기 도사가 제사를 지냈을 때 사용했던 제물이라고 한다. 보허정은 보호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있는데 산에 있는 것은 마치 신선이 산다는 산과 옥돌로 지은 누각에 있는 것 같다. 이 높은 곳에 주위를 바라보면 정호봉 꼭대기의 기관과 구곡연계, 십리화랑 등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수 있다.

  정호봉제각(제각: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새긴 글자). 정호봉 암벽에는 5곳의 마애제각이 있는데: 정호봉 서쪽 벽에 고풍스러럽고 힘이 있게 보이는 대형 “정호성적”으로 써 있는 해서 마애가 있는데 글자의 직경이 3미터이고 전체 마애의 높이는 3.5미터이고 넓이는 13미터이다. 이는 명대 절강 순무 상거경의 제각이다. 북쪽의 기슭에는 지면보다 2미터 높은 봉우리벽에는 북송 엽청신의 

  헌원철적. 보호산의 석순 중에 남북방향으로 산을 의지한 산골짜기가 있는데 이는 차바퀴가 지나간 흔적과 같이 보인다. “옛날에 황제가 용차를 타고 이 산에 많이 올라왔는데 용차의 바퀴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원『선도지』), 이로 인하여 헌원철적이라고 하게 되었다. 송대의 서법가 소순원의 시에는 “용차가 바람을 타고 하늘을 향하고 바퀴자국이 너무 높아서 오를 수가 없다. 바람이 정호수를 지나갈 때만 청연화잎이 인간 세상에 떨어진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