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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적벽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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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식암, 고부암이라고도 부른다. 자모 두 산릉의 바위가 대치하여 상대거리가 백십여 미터이고, 북쪽에 서 있는 자는 날씬하고 아름답지만 머리가 없는 젊은 부인과 같으며 남쪽에 낮게 꿇어앉는 자는 생동감이 있는 노부인과 같다. 두개의 바위 중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형태로 아주 생동하고 표정이 명확하다. 고증에 따르면 이는 화산암산릉이 풍화침식, 유수침식, 중력붕괴작용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옛날에 어떤 과부와 아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살았는데 이 독자가 장가에 간지 3일 후에 강제로 징병하게 되었다. 불효한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학대하는 것에 천지자연의 이치로써 용납할수 없어 벼락에 맞아 머리가 끊어졌다고 한다. 파식암은 선도에 들어가는 처음 풍경으로 파식(고부)영빈이라고도 부른다.

  구교암, 선석암이라고도 부른다. 하양촌 라이퍼드산릉은 두 바위가 서로 임접하여 서있고, 앞에 있는 작은 바위가 보자기를 메고 있는 건장한 청년과 같고 뒤쪽에 있는 큰 바위가 가마 한채와 같이 보인다. 이 두 바위는 고부암과 계천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과부암 중 며느리의 남동생이 누나가 고부갈등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마로 마중나와 누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기분을 풀게 하려고 하는데 마침 누나의 머리가 벼락에 맞아 끓어진 장면을 보고 남동생이 너무나 질겁하고 슬퍼서 다리가 굳어져 앞으로 나가지 못해 가마와 함께 구교암으로 변해 버렸다고 하였다.

  소적벽, 고대에는 백암이라고도 하였다. 하양촌 계곡 한측에 있는 험준한 절벽인데, 동서로 약 650미터, 높이가 약 60미터이고, 절벽은 홍백이 엇갈려 있으며 멀리 바라보면 불길이 지나간 것과 같이 보인다. 이는 장강적벽과 흡사하며 규모가 비교적 작기 때문에 소적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적벽에는 인해(명대의 공정빈이라는 현령이다)라는 사람이 제자한 “소적벽”이라는 글자를 개겨 있다. 산체는 원래 동북으로 단열되었는데 시냇물의 침식과 풍화작용에 인해 암석이 붕괴되고 단면이 드러났어 절벽기관으로 이루어졌다.

  용경로. 소적벽에 가로놓여 있는 천연석랑이다. 길이가 약 400미터이고 넓이가 1~3미터이며 높이가 2~3미터인데, 이는 수면보다 수십미터 더 높은 데에 있다. 이 절벽은 원래 응회암질인데 천만년의 풍화침식과 유수침식에 인해 점차 현재의 석랑이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동한 유수가 황제로 되기 전에 이곳까지 왕망군들에게 추살을 당했는데, 앞에는 심연과 절벽이 있고 뒤에는 추병이 있었던 위급한 상황에 금용 한마리가 계곡에서 솟아나와 험준한 절벽에 석랑을 만들어 유수가 위험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했는데 이로하여 이 석랑을 용경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선방암. 소적벽 위에 올챙이모양과 같은 글자가 많이 있는데 오랜 시간의 흐름속에 자연침식에 인하여 벗겨지고 글자와 같지만 글자가 아니고, 문장과 같지만 문장이 아닌 형태로 쉽게 해독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이를 선인이 쓴 방문이라고 해서 선인방이라고 부르게 되고, 방문을 게시하는 절벽을 선방암이라고 부르게 된다. 절벽에 역대의 많은 제자가 있는데 현재 석각이 8곳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 남송 유명한 시인 왕식의 『소봉래가』와 청대 유명한 문학가 원매의 『유선도봉기』는 모두 편폭이 길어서 유명하다.

  소봉래. 소적벽 앞못의 물이 푸르고, 안에 많은 기석이 오밀조밀하게 둘러싸여 있다. 못에 있는 섬에 버들이 우거지고, 섬에 있는 호수에 잔잔한 파도가 빛에 반짝이고 있다. 경치가 사람을 따라 이동하고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해 주기 때문에 소봉래라는 이름을 지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팔선이 늘 여기에 와서 유람하면서 휴식을 취하기에 소봉래 동쪽에 판선정을 건설하였다. 또한 영화

  팔선정. 이는 소적벽 절벽 아래에 있는 높이가 5미터인 팔주사각형 석정이다. 정자의 각 정각에 살아있는 듯한 팔선신상 두 개를 조각하여 있다.  정명편액은 중국 20세기의 서법 태두인 사맹해가 친필로 쓴 글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팔선은 늘 소적벽에 와서 휴식을 취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전설을 남겼다고 한다.

  운관, 합장암이나 합장동이라는 속칭도 가지고 있다. 팔선정 북쪽에 거대한 암석 한뙤기가 무너져 가파른 절벽에 기대게 되었는데, 이의 윗부분은 합쳐지고 아래부분은 갈라졌는데 형태가 두 손바닥이 합장하는 것과 같다. 동굴내의 내벽은 칼로 베인듯이 평탄하고 동굴의 넒이는 약 60평방미터이고 동굴내는 겨울에 따듯하고 여름에 시워하여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할수 있는 좋은 곳이다. 남측의 절벽에는 명대 인해가 새긴 “운관”이라는 마애가 있고 북측에는 현대 왕금산이 새긴 “적벽운관”이라는 마애가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가 승천했을 때 동굴남쪽은 해빛이 찬란하고 북쪽은 구름으로 쌓였는데 이로 하여 고인들은 이를 “운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실. 용경로 동북쪽에 “곤암동천”이라는 고 연단실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동남쪽에서 10여보 되는 곳에 새로 건설하였다. 정여벽 호 곤암, 명만력6년(1579)에 배척 당해 경성에서 쫓겨났고, 이듬해에 광동 안찰사(관직)에서 물러나서 은거하였다. 정여벽은 선도에 있는 조예가 깊은 도사인 갈씨라는 연금술사와 친분이 아주 두텁다. 갈씨는 선방암에 단실을 세워서 단약을 만들려고 하는데, 정여벽은 이를 위해 절벽에 계단을 만들어서 용경로 끝에 절벽에 단실을 지었다. 안기헌이 이는 “참으로 훌륭하다”라고 칭찬했는데 후인은 “곤암동천”을 동굴벽에다 새겼다.

  대두암(대복암). 소적벽 동북쪽에 벼랑이 우뚝 서있는데 둘레는 약 100여 미터이고 높이가 55미터이며 머리가 작고 배는 북과 같이 크기 때문에 대두암(대복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황제가 단약을 만들었을 때 산에다 옥시루를 놓어서 밥아주머니를 배치하였고 이후로 밥을 끊임없이 제공하였다. 한번 식탐한 선인 한분이 시루에 담은 밥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밥아주머님도 밥을 끊임없이 제공하다가 이 성인의 배가 신속히 커지고, 선인이 간신히 개울을 건는 뒤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거대한 대두암으로 되어 버렸다. 바위위에는 천만년을 거친 짙은 갈색 꼬리모양의 물흔적이 있는데 이는 도롱이의 밑단과 같아 우사암(도롱이암)이라기도 한다.